후한 최후의 명장. 황보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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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u0gY546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0-12-01 00:32본문
황보숭(皇甫嵩). 자를 의진(義眞)이라 하며 안정(安定)군의 조나(朝那)현 사람이다. 후한 말 혼란스러웠던 시기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불충한 자들이 날뛰었지만 황보숭만큼은 문무를 겸비한 충신이었다고 전해진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평균 능력치 70대로 (통무지정매) 통솔력을 제외하면 그리 높지 않은 편으로 표현됐다. <삼국지연의>에서 그 비중이 매우 적어 모르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황보숭은 후대 당나라, 송나라 대에 강태공의 묘에 제사를 지내면서 주변에 세울 무인석(武人石, 무인들의 석상)에 들어가는 명장으로 선발됐다. (세워진 74명 중 황보숭과 같이 무인석으로 만들어진 삼국지 인물들은 관우, 장비, 여몽, 육손, 육항, 주유, 장료, 등애, 양호이며 제갈량은 한신, 장량과 함께 상석에 배향되는 10인에 들어가 있다.)
정사 삼국지에는 황보숭의 열전은 따로 없으므로 <후한서 황보숭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애초에 삼국지 열전 속에 들어가야 할 인물은 아니다.)
1. 생각보다 금수저
황보숭은 도요장군(度遼將軍) 황보규(皇甫規)의 조카였고, 아버지 황보절(皇甫節)은 안문태수(鴈門太守)였다. 황보숭은 어린시절부터 문무 양면에 뜻이 있어 독서를 즐기고 궁술과 마술에 열중했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이 되었고, 패릉과 임분의 현령으로 승진했지만 부친 황보절이 죽어 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했다.
태위 진번과 대장군 두무는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막하에 두기 위해 계속 불러들였지만, 황보숭은 이를 매번 거절했다.
후한 영제가 공거(公車)를 보내 의랑으로 삼고, 북지군 태수에 임명한다.
(공거公車는 빈 수레다. 훌륭한 인물을 불러들일 때는 빈 수레를 보냈다고 한다.)
이때 거록에서 멸망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 등장하니 그는 바로
장각이다.
2. 후한 말
후한말에 들어 황제가 계속 일찍 죽고 어린 태자가 즉위하는 일이 잦아졌다. 때문에 그의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시국이 형성되었다.
황제는 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환관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는 환관들이 득세하여 외척을 숙청하고 황제가 요절하면 다시 어린 황제가 즉위하며 그의 외척들이 환관들을 숙청하는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었다. 애미없는 황제가 등극하지 않는 이상, 이 순환은 무한해 보였다.
(황제가 요절하니 황후 또한 젊다. 그래서 사실상 무한했다.)
(이 현상만을 두고 후한이라는 나라는 막장의 순환고리에 갇혀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후한은 광무제부터 강력한 중앙집권화된 정치체제를 지향했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만들어 줄 세력들이 언제나 필요했다.
그것이 부패한 외척과 환관이었던게 문제였지)
나라를 창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나 황족들을 기반으로 황권을 다지지만, 나라가 안정되고 나서의 황족들은 반역의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건강하지 못했던 후한은 황제가 없으면 그 권력을 쉽게 잃어버리거나 황제의 신임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들인 외척, 환관이 대신하여 그 중심이 된 것이다. 악순환은 이것이 크게 왜곡되어 벌어진 일일 뿐이다.
후한 환제때에 두황후의 아버지 두무와 태위 진번이 건석에게 죽임을 당한다. 외척은 붕괴되고 환관세력에게 모든 힘이 집중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십상시'다. 이들은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돈을 주고 벼슬을 산 관리들은 그 본전을 뽑기위해 백성들을 수탈했다. 삼공 직위보다 세금징수가 용이한 태수직이 더 비싸게 팔리는 경우까지 생긴다.
3. 황건적의 난
고대부터 인류는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이 궁핍하면 종교에 의지하는 경우들이 보였다. 반대로 종교를 통해 사람을 규합하기 쉬웠고, 이를 통해 세력을 만들기도 용이했다. 장각이 그러했다. 장각은 동생 장량, 장보와 함께 우길이 창시한 도교의 한 일파인 태평도를 전파했다.
태평도는 태평한 기운이 뻗어나가면 큰 덕을 지닌 군자가 세상에 나타나 평화의 시대를 이룩한다는 사상과 음양오행의 이치를 기반으로 크게 성장해 나갔다. 장각은 스스로 그 군자라 말하며 대현량사라 했다.
장각은 그의 신도들에게 꿇어 엎드려 자신에게 배례하며 과오를 고백시켰고(고해성사네) 부적과 물을 써서 주문을 외우며 병을 고쳤다. 환자들의 병이 나으니, 사람들은 그를 신처럼 떠받들기 시작했다. 장각은 이에 자신의 제자 여덟사람을 천하의 사방으로 보내어 사람들을 미혹했다.
10년이 채 되지도 않아 신자들의 무리가 수십만에 이르렀다. 청주, 서주, 유주, 기주, 형주, 양주, 예주의 사람들 모두가 장각에게 응했다. 장각은 각지에 36개의 방(군영)을 설치했다. 대방은 만명이상, 소방은 6~7천명 정도로 구성했고, 각기 거수를 세웠다. 장각과 그의 신자들은 천명(天明)을 구실로 하여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창천은 이미 죽었고, 황천이 세워져야 한다. 때는 갑자이니, 천하가 크게 길할 것이다."
라고 하며 낙양과 각 주군의 공무소에 방을 붙이고 병사를 일으켰다. 장각은 천공장군이라 자칭했고, 동생 장량 장보는 인공장군, 지공장군이라 했다. 그들은 황색 두건을 둘러 서로를 알아보는 표증으로 삼았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황건'이라 불렀다.
그들은 도착하는 곳 마다 관아를 불태우고 마을마다 약탈을 자행했다. 주군(州郡)에는 거처할 곳이 없어져 수많은 관리들이 도망쳤다. 장각의 거병 한달만에 천하가 황건적으로 인해 요동쳤다. 이에 대응한 조정은 함곡관으로부터 대곡, 굉성, 이궐, 환원, 선문, 맹진의 각 관문에 도위를 설치하고 각지에 황건적을 토벌하라는 조서를 내린다.
4. 황보숭의 황건적 토벌
황보숭은 난이 일어나자 영제에게 재물과 말을 풀어 군사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주청하였고, 영제는 이에 따랐다.
황보숭은 좌중랑장이 되어 우중랑장 주준과 함께 4만의 병력을 통솔하여 출병했다.
주준은 영천에서 파재의 무리들에게 대패했다. 이에 황보숭은 수비하였다. 파재가 많은 무리를 이끌고 와 성을 포위했다. 황보숭은 병사가 적었고 제장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황보숭은 제장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전투에는 정(정예함)과 기(기세)가 중요하다. 병사 수의 많고 적음은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도적들은 초원에 진영을 두고 있다. 바람을 이용해 불을 놓기 쉽지 않은가! 혹여 야음을 틈타 불을 놓아 진영을 태워버리면 적은 필시 크게 놀라 붕괴할 것이다. 내가 병력을 내어 이를 쳐, 사방에서 힘을 모아 이를 공략하면 전단과 같은 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화우지계火牛之計>
앞서 황보숭이 말한 전단의 계책이다. 전단은 전국시대 제나라의 장수로 연나라군의 공격을 받아 즉묵성을 사수하고 있었는데, 전단은 소 천마리를 모아 오색옷을 입히고 창칼을 뿔에 매달고, 꼬리에 불을 붙여 성 밖으로 돌진시켰으며 성곽에 올라 크게 북소리를 울렸다. 소에게 습격당한 연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는 기록이 사기(史記)에 있다.
황보숭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전원에게 횃불을 들어 성곽에 오르게 했고, 정예병을 은밀히 밖으로 내보내어 불을 놓으며 큰 소리를 내게 했다. 성 위에서는 횃불을 집어던지며 이에 호응했다. 황보숭은 이때 북을 두드리며 파재의 전열로 돌진했다. 적은 놀라 대오를 흩뜨리고 패주했다. 이 무렵에 영제가 기도위 조조에게 기병을 통솔케 하여 보냈는데, 황보숭과 조조는 주준과 힘을 합쳐 다시 전투를 벌이고 크게 격파했으며 수만급의 목을 배었다. 이에 조정은 황보숭에게 도향후의 작위를 주었다.
황보숭과 주준은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여남, 진국에서 황건적을 계속 토벌했다.
파재를 양적까지 추격하였고, 팽탈을 여남에서 공격하여 격파했다. 남은 적들은 모두 항복하거나 달아났다. 영천, 여남, 진국 세곳은 안정을 되찾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동군으로 진격하여 황건적 복사를 창정에서 격파하고 생포하였으며 난적 7,000여 수급을 거두었다.
당시 북중랑장 노식과 동중랑장 동탁은 장각을 공격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하고 패퇴하고 있었는데, 조정은 황보숭에게 병력을 진출시켜 돕도록 했다. 황보숭은 장각의 동생 장량과 안평군에서 싸웠다. 장량의 부대는 정예였으므로, 황보숭은 이길 수 없었다. 다음날, 황보숭은 진영의 문을 굳게 닫고 병사를 쉬게 하며 적의 동태를 살폈다. 장량군의 사기가 느슨해진 것을 보고는 은밀히 야습하여 장량을 격파하고 참수하였다.
삼만급을 참수했고 오만명이 물에 빠져 죽었으며 치중을 삼만냥 이상 얻게 된다.
이때 장각은 병사하였는데, 그 관을 탈취해 열어 사체를 드러내고, 그 목을 베어 낙양으로 보냈다. 황보숭은 거록태수인 곽전과 더불어 장각의 동생 장보를 곡양에서 공격하여 격파하고 참했으며, 여기선 10만명을 죽이거나 생포해 큰 공을 세웠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황보숭의 공적 일부가 각색되어 유비에게 입혀진 것이다!!)
(유비는 추정과 함께 황건적을 격파하고 중산국 안위현의 현령이 되었다고 짧게 서술되어있다. 그러니까 <삼국지연의>처럼 공을 아주 크게 세웠는데도 현령정도밖에 되지 못하다니! 하는 말은 다 허구다. 아무리 정국이 혼란스러워도 연의처럼 장량, 장보를 직접 토멸하고 동탁을 도왔으면 공로가 인정되었을 것이다. <선주전>에서는 동탁을 욕하는 내용만 있고, <동탁전>에는 유비가 나오지 않는다.)
고나우야! 이거봐봐 ㅋㅋ 내가했대 내가! 히힉ㅋㅋ
5. 염충에게 창업을 제안받다.
조정은 황건 토벌에 큰 공을 세운 황보숭에게 좌거기장군의 직과 기주목을 겸하게 했고, 괴리후의 작위를 내렸으며 식읍을 8천호나 내렸다. 황보숭은 기주목의 자격으로 표를 올려 기주의 일년간 조세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청했고, 영제는 이를 따랐다. 사람들은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저잣거리는 황폐해졌으며, 어미는 자식을 돌보지 못하고, 아내는 남편을 잃었다. 그러나 황보님의 은덕으로 다시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되었구나"
라고 노래를 불렀다.
황보숭은 사졸들에게 온정으로써 자비롭게 대하였으므로 부하들의 신임을 얻었다. 군을 진격하든 머물든 항상 진막이 완전히 차려진 이후에야 숙영에 들어갔고, 휘하 군사들이 모두 식사를 마친 뒤에 자신도 밥을 먹었다. 수하들 가운데 뇌물을 받은 자들이 있어도 그들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금품을 내렸다. 이에 뇌물을 받은 관원들 중에는 부끄러워 자살하는 자도 있었다. 이렇듯 황보숭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가자 신도현령인 염충이 황보숭과 독대하며 설득한다.
(염충은 이전 가후편에서 가후를 장량, 진평에 버금간다고 평한 인물이다. <가후전>에도 염충을 설명하면서 다음의 내용이 주석으로 달렸다.)
"얻기는 힘들고 잃기는 쉬운 물건이 바로 시(時)입니다. 때가 왔을 때 (이를 잡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얻지 못할 것이 바로 기(機)입니다. (합쳐서 시기時機다. 알맞은 때나 기회를 말한다.) 고로 성인은 때에 좇아 움직이고, 지자는 기를 따라 일을 도모한다고 합니다. 지금 장군은 얻기 힘든 때를 만나는 행운을 잡았고, 잃기 쉬운 기회와 만났습니다. 그런데도 때를 취하지 않고, 기에 임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큰 명성을 얻겠습니까?"
"자네는 무슨 말을 하는건가?"
라고 말하자 염충은 답한다.
"천도에 가깝고 먼 것이 없고, 백성은 유능한 자를 따릅니다. 지금 장군은 늦봄에 도끼를 얻었고, 늦겨울에 공을 얻었습니다.
군을 움직이면 신과 같으며, 그 계책은 감히 누구도 따라할 수 없습니다.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평안케 하며, 굳어진 일을 푸는 것이 마치 눈에 따뜻한 물을 붓는 것 같으니, 열 달 사이에 신병은 번갯불처럼 적을 섬멸하여 적의 시체를 가득 쌓았고, 석비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며, 남쪽으로 향하여도 위세를 드높였습니다. 그 위덕은 본조(한나라)를 진동케 했으며, 명성은 해외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탕(탕임금), 무(주무왕)가 행한 일이라 할지라도, 장군보다 윗줄에는 서지 못할 것입니다. 공을 세워도 제대로 상을 받지 못하고, 높은 선비의 덕을 겸하였어도 범용한 군주를 북면(군주를 섬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인데 어찌 평안함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늘 공정함을 마음에 두고, 충성을 잊지 않고 있소. 어찌 평안치 않겠소."
그러자 염충은 아주 기이이이이이이일게 설득한다.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과거 한신이 밥 한 끼 얻어먹은 은혜 (一餐之遇)를 잊지 않아 천하삼분의 계책을 버렸으니, 이는 예리한 칼을 삼킨 것 같아 후회와 한탄의 탄식을 토해낸 것은 기회를 버리고 모략에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한신은 항우의 제안과 괴통의 계책을 거절하여 자립하지 않고, 유방에게 끝까지 충성했지만 버려져 후회했다. 이를 말한 것.)
지금, 주상은 유방, 항우보다도 힘이 약하고, 장군의 권세는 회음(한신)보다도 큽니다. 손가락을 흔들기만 해도 풍운을 일으키고, 질타하는 것만으로 번개를 불러올 정도입니다. 장군은 결연히 떨치고 일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적을 깨쳤으며, 은혜 두텁게도 앞장서시어 따르는 자를 평안케 하였고, 무위를 떨쳐 항복치 않는 자들을 굴복시켰습니다. 또한 기주의 병력을 모았고, 7개 주의 백성을 동원하였으며, 우격(급한 소식을 돌릴 때 쓰는 문서)을 달려 보내, 앞으로는 대군이 울릴 듯이 일어나시고, 뒤로는 장하를 뛰어넘어 맹진에서 말에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또한 환관의 죄를 처벌하고, 산더미같이 쌓인 흉적의 무리를 제거하였습니다. 장군께서는 어린 아이들에게 조차 주먹을 휘두를 힘을 주셨고, 여자에게도 명을 내려 옷을 걷어붙이고 싸우게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곰과 같은 병사를 일으키기만 한다면, 곧 질풍같이 세력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공업은 이미 이루어졌으며, 천하는 모두 장군께 마음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상제의 명을 받들어 천명을 드러내 보이고, 육합을 하나로 모아 남면하여 천자를 대신하여 명령을 행하고, 보기(옥새)를 새로운 왕조로 옮기도록 하십시오. 거사에 관해 생각해보니, 한의 힘은 이미 땅에 떨어졌으며, 실로 하늘이 내린 시기가 도래하여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썩은 나무는 조각하기 어렵고, 쇠약한 세상은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혹여 지키기 어려운 이 조정을 지탱하며, 썩어버린 나무에 조각하려 하신다면 그것은 언덕을 거슬러 공을 굴려 올리는 것이며, 배를 타던 중 바람이 부는데 노를 버려버리는 것 같으니, 이게 어찌 용이한 일이겠습니까? 지금 환관이 악을 행하며 무리 짓는 것이 마치 저잣거리에 사람 모이듯 합니다.
위(황제)의 명령은 행해지지 않으며, 권력은 근습(근신)에게 돌려지고 있습니다. 암군 밑에서 몸을 펴는 것은 어려울 터입니다."
설득하는 표현력은 대단하지만 읽기싫은사람을 위해 한줄 요약해보면
- 황건적을 토벌하는데에 황보숭 너의 공이 굉장히 크다. 지금 황제는 암군이어서 간신배들에게 휘둘리고 있으니 너가 옥새를 들고 왕조를 세우는게 어떻겠느냐. 가만히 있으면 한신 꼴이 난다.
는 내용이다.
황보숭은 두려워 하며 대답한다.
"특단의 대책은 통상의 사태에는 채용할 수 없는 것이오. 처음부터 큰 공훈을 올리고자 생각하였다면, 어찌 내 범용한 재주로 이를 이룰 수 있었겠소? 황건은 작은 화에 불과하니, 진나라나 항우에 필적하지 못할 것이오. 갑작스레 일을 꾸미더라도, 그저 허둥대는 꼴이 되기 쉽고, 대사를 성공시키기는 어려울 것이오. 또한, 백성들은 아직 천자를 잊지 않고 있소. 하늘은 역적을 돕지 않는다 했으니, 분수에 넘치게 공을 논하며 아침저녁으로 재난(반역) 일으키기를 서두른다면 어찌 조정에 충성을 바치고, 신하의 절개를 지키는 일이 가능하겠소? 참언(모함)이 많다 하여도 제멋대로 황위를 빼앗는 일보다 더하겠소? 영명이 남는다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리에 어긋나는 말은 듣지 않겠소."
염충은 자신의 헌책이 황보숭에게 닿지 않자 물러갔고, 도망쳤다.
6. 농우의 난과 환관과의 대립
염충이 황보숭에게 설득할 무렵, 변장과 한수가 농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은 황보숭에게 조서를 내려 장안을 둘러싸고 적도들을 압박하도록 했고, 원릉을 지키도록 명했다. 황보숭은 이들 모두를 토벌했다.
중상시 조충의 저택은 기주 업에 있었는데, 저택의 규모가 규정을 위반했다. 이에 황보숭은 조정에 상주하여 몰수하도록 했다. 또한 중상시 장양이 은밀히 5천만전의 뇌물을 요구했지만, 황보숭은 이를 거절했다. 두 사람은 이로 인해 황보숭에게 원망을 품어 영제에게
'황보숭이 거듭 싸웠지만 공을 올리지 못했으며, 쓸데없는 군비나 물자를 소모한다.'고 주장했다. 황보숭은 소환되어 좌거기장군직에서 면직되고 식읍 8,000호 중 6,000호를 몰수당한다.
188년, 양주의 도적 왕국 등이 거병하여 황보숭에게서 도망친 염충을 협박하고, 그를 맹주로 삼아 36개 군을 통치하며 거기장군으로 강제 임명했다. 염충은 이에 낙담하여 죽었다. 조정은 황보숭을 좌장군으로, 동탁을 전장군으로 임명해 각기 2만씩의 병력을 이끌고 막게 하였다.
동탁은 빨리 출진하여 진창으로 향해야 한다 주장했지만 황보숭은 반대했다.
"지자는 때를 놓치지 않으며, 용자는 결단을 늦추지 않는다 하오. 구원이 빠르게 이루어지면 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요, 늦어지면 성은 함락될 것이니, 어찌 전멸치 않을 상황이겠소."
"그렇지 않소. 백번 싸워 백 번 이기더라도 싸우지 않고 적의 병력을 굴복시키는 것만 못하오. 이 때문에 '먼저, 패하지 않도록 태세를 갖추고, 적이 틈을 보이기를 기다린다. 아군은 먼저 나서 싸울 필요가 없고, 적에게는 이러한 이유가 있어, 선공하는 것은 지키는 것 만 못하니, 아군에는 여유가 있다.' '싸움에 여유가 있는 자는 높은 하늘에서 움직이며, 미치지 못하는 자는 깊은 땅 속으로 떨어진다.'라는 말이 있지 않소?
지금, 진창은 작은 성이라고는 하나 수비가 견고하니, 깊은 땅속에 매몰된 (불리한) 상황이 아니오. 또한 왕국은 강력한 군세를 거느리고 있다고는 하나, 우리들이 구원치 않으면 진창이 함락될 정도의 구천의 세력이 아니오. 구천의 세가 아니라면 공격하는 자는 필시 피해를 입을 것이고, 구지의 밑에 떨어지지 않는 한(깊은 땅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한, 극히 불리한 상황) 성이 함락될 일도 없을 것이오. 왕국은 이미 손해를 입어 불리한 상황이며, 진창은 여전히 난공불락이오. 우리 군은 병력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민중을 동요시키지 않고, 아무 피해 없이 승리하여 공명을 취하여야 할 것이오. 어째서 급히 구원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오?"
수비를 잘 하는 이는 깊은 땅속(구지)에 숨고, 공격을 잘 하는 자는 높은 하늘(구천) 위에서 움직인다. 현녀삼궁(황제에게 병법을 강의한 신녀)의 전법에 이르기를 '용병의 법도는 천지를 중시하는 일이다. 높은 하늘 깊은 땅속에는 각기 겉과 속이 있다. 높은 하늘 위에는 육갑자가 있고, 깊은 땅에는 육계유가 있다. 그대는 이를 잘 따라서 만전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한다.
<손자병법>
황보숭은 손자병법에서 말한 기책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과연 왕국은 겨울부터 봄에 이르기까지 80여일에 걸쳐 진창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스스로 상황이 피폐해지자 물러났다. 이때 황보숭은 병력을 출진시키려 했다. 그러자 동탁은
"이는 좋지 않소. 병법에 '궁한 적을 쫓아서는 안 된다. 돌아가려는 자를 쫓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있소. 지금, 우리가 왕국을 추격하면, 이는 돌아가려는 자들을 쫒는 것이며 궁한 적을 추격하는 것이오. 궁지에 몰린 짐승은 다시금 싸우려 할 것이니, 벌이나 전갈에게는 독이 있지 않소? 하물며 큰 무리의 사람은 어떠하겠소?"
동탁은 <사마병법>과 <춘추좌씨전>의 구절을 인용해 황보숭의 진격을 말린다. 하지만 황보숭은 동탁을 두고 단독으로 왕국을 공격했다.
황보숭은 거듭 싸우며 적을 모두 격파했다. 1만여급의 수급도 얻었다. 왕국은 도주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죽었다.
동탁은 이로 인해 수치심을 느꼈고 황보숭을 증오하게 되었다.
조정은 동탁을 전장군에서 병주목으로 전임시키면서 조서를 내려 휘하 병력을 모두 황보숭에게 위탁하라 명하지만, 동탁은 휘하 군대가 자신을 더 잘 따른다는 핑계를 대며 듣지 않았다. 황보숭의 종자(맏아들) 황보려는 이때 군중에 있었는데, 황보숭에게 동탁을 죽이라 설득한다.
"우리 조정은 정치에 실패하여, 천하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위험을 다스려 평안케 하고, 기울어진 것을 바로 세울 힘이 있는 분은 대인(황보숭)과 동탁뿐입니다. 지금 원망으로 인해 마음이 이반되었고, 세불양립의 형세입니다. 동탁은 병력을 대인께 맡기라는 조칙을 받고도, 상주하여 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자신이 병력을 지휘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도는 혼란에 빠져있는데도 주저하며 병력을 내지 않는 것은 사악한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또한 동탁은 도리에 등을 돌린 자이고, 친애하는 정이 없으며, 사졸들을 아끼는 마음이 없습니다. 지금 대인이 원수가 되시어 국적을 격파하신다면 위로는 충의를 지키고, 아래로는 흉적의 해악을 제거하시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환공, 문공(제환공, 진문공)의 사적이라 할 만할 것입니다."
황보숭은 이 설득 또한 거절한다.
"명령을 자기 뜻대로 거부하는 것도 죄이지만, 이를 함부로 주살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사실을 밝혀 이를 상주하고 조정의 판단에 맡기는 것 보다 나은 방책은 없다."
이에 조정에 표문을 올려 동탁의 일을 황제에게 물었다. 영제는 동탁을 책망했고, 동탁은 더더욱 황보숭을 원망하게 되었다.
7. 동탁에게 결국 순응하다
동탁은 십상시의 난 이후 정권을 잡아 전횡한다. 190년, 동탁은 황보숭을 소환하여 성문교위직을 맡으라 명하고는 그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보숭이 명을 받고 나가려던 찰나에 장사(長史) 양연이 그를 설득한다.
"한실은 쇠퇴하여 환관이 정치를 어지럽혔습니다. 동탁이 이를 주살하였다고는 하나, 아직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동탁은 또한 수도의 논밭을 약탈하였고, 뜻대로 폐위를 행하였습니다. 지금 장군을 불러들이고는 있으나, 크게는 위험한 화를 당할 것이고, 작게는 괴로운 굴욕을 당하실 듯하다. 지금, 동탁은 낙양에 있고, 천자는 서쪽에 계시니, 장군의 부하 정병 삼만으로 천자를 맞이하여 조칙을 받들어 역적을 토벌하라는 명을 국내에 발하여 각지로부터 군을 모아, 원 씨는 동쪽에서 장군은 서쪽에서 이를 친다면 동탁을 잡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황보숭은 이 설득 또한 따르지 않았고, 동탁의 소환에 응하였다.
결국 황보숭은 붙잡혀 옥에 갇힌다. 황보숭이 처형되려던 때에, 황보숭의 아들 황보견수는 평소 동탁과 사이가 좋아 낙양으로 동탁에게 찾아와 대의로써 동탁을 책망하고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숙였다. 좌우에서는 감동하여 황보숭의 사면을 빌었다. 동탁은 이에 황보숭을 사면했다.
황보숭은 석방되어 의랑에 임명되었다가, 어사중승으로 승진했다.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자 공경과 백관들은 모두 길에 도열하여 맞이했다. 동탁은 어사중승이하 모든 관원의 배례를 받아 황보숭을 공적인 자리에서 굴복시키고자 했다. 황보숭의 절이 끝나자 동탁은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의진(황보숭의 자). 아직도 내게 복종하지 않을 텐가?"
"명공께서 이리 되실 지 내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홍곡(기러기, 고니)에게는 본시 큰 뜻이 있는 것이다. 허나, 참새는 이를 모르는 것이다."
"과거에 명공과 나는 두 사람 모두 홍곡이었으나, 그저 명공이 오늘에 와서 봉황으로 변한 것뿐이겠지요."
황보숭이 웃자, 동탁은 마음을 풀었다.
동탁이 여포에게 죽자 황보숭은 동탁의 일족을 모두 주살했다. 조정은 황보숭을 정서장군에 임명했고, 다시 거기장군으로 승진시켰다. 그해 가을에 태위로 임명되었으나 겨울에 별똥별이 떨어져 면직되었다.
(유성은 고대부터 중세까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국가의 길흉을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이때의 유성은 흉이었던 모양이다.)
황보숭이 동탁의 아래에서 공을 크게 세워 태위가 되었다고 아는 사람이 있지만, 태위가 된 시점은 동탁 사후다.
8. 죽음과 평가
면직된 황보숭은 다시 황명에 의해 광록대부와 태상까지 올랐다가 이각, 곽사가 장안을 공격할 즈음 병사했다. 아들 황보견수는 시중으로 임명되었지만, 사관을 거절하고 낙향했다.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 황보숭은 후한말 황건적의 난을 모두 토벌한 명장이었다. 다만 정치적인 측면이 매우 떨어져 '그저 우직하게 황제에게 충성만을 하는' 인물로 기록되었다. 황제에게 충성하고 능력을 발휘해 공로를 세웠지만, 큰 야망이 없어 여러 사람의 설득을 물리쳤고 강직함으로 인해 동탁을 적으로 만들었다.
황보숭이 조조와 같은 성품이었다면 후한의 역사는 100여년동안 혼란기를 거치며 삼국으로 분할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후대에 황보숭을 평하는 사료들이 딱히 없어 평가는 펨붕이들의 자유로 해야될 것 같다.
(언제나 자유다. 어떤 측면으로든 강요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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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편 링크모음>
https://www.fmkorea.com/3223967035
다음화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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